다사다난했던 한해를 보내며 2013년 가장 화제가 되었던 '말'이 무얼까 돌이켜보았다. "바쁜 벌꿀은 슬퍼할 겨를도 없다"라는 박근혜 대통령의 어록과 "난 사람에 충성하지 않는다"라는 윤석열 검사의 명언 등이 경합을 벌였지만 다람쥐주인의 방 선정 '올해의 말'의 주인공은 왕년의 아이돌그룹 클릭비의 맴버 김상혁으로 선정됐다. 김상혁은 올해 공식적으로 단 한차례도 활동한 바 없으나 그의 ‘말’은 살아서 2013년 대한민국을 관통했다.

 

님 '아차상' 드릴께요

 

‘술은 마셨으나 음주운전은 하지 않았다’

 

2005년 음주 뺑소니사고를 일으킨 뒤 김상혁이 기자회견장에서 남긴 불세출의 명언이다. 8년 전의 발언을 '올해의 말'로 선정한 이유는 이것이 올 한해동안 수도 없이 리메이크되었기 때문이다. 지금 와서 보면 그는 아이돌가수라기보다는 음유시인이자 대 문장가였다. 일찍이 김상혁처럼 세대를 초월해 구전되는 어록을 남긴 연예인은 없었다.

 

남의 아픈 과거를 들춰내는 것을 두고 우스갯소리로 ‘두 번 죽인다’라고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 김상혁은 올해 5만번쯤 죽었다.

 

 “정치댓글은 달았으나 대선개입은 아니다” - 경찰, 국방부 수사본부

 

 “자회사는 만들겠으나 민영화는 아니다” - 코레일, 청와대

 

 “부정선거는 맞지만 대선불복은 아니다” - 민주당

 

 "엉덩이는 '톡톡' 쳤으나 성추행은 아니다" - 윤창중

 

 “난교파티는 맞지만 성접대는 아니다” - 검찰

 

올해 초 박근혜 대통령께서는 ‘창조경제는 로열티지불이다’라고 정의하셨다. 창조경제가 제대로 작동됐다면 김상혁은 아마 돈방석에 앉았을 거다. 열거한 문장들은 모두 김상혁의 어록이 아니었다면 상상도 하지 못했을 법한 괴상한 문장들이다. 김상혁의 망언이 듣는 이의 어안을 벙벙하게 만드는 이유는 뻔하게 드러난 인과관계를 말장난처럼 부정하기 때문이다. 주제는 모두 다르지만 위 문장들의 구조는 김상혁 망언의 그것과 정확히 일치한다.

 

"술은 마셨으나(a)는 음주운전(a-1)은 아니다”

 

정치댓글(a)은 달았으나 대선개입(a-1)은 아니다. 자회사(a)는 만들겠으나 민영화(a-1)는 아니다. 부정선거(a)는 맞지만 대선불복(a-1)은 아니다. 엉덩이는 '톡톡' 쳤으나(a) 성추행(a-1은 아니다. 난교파티(a)는 벌였으나 성접대(a-1)은 아니다.  

 

이 문장들은 모두 '인과(因果)의 부정'이라는 공통점을 갖는다.

 

비운의 한해를 보낸 김상혁

 

 

“정치댓글은 달았으나 대선개입은 아니다”

 

국정원 심리전담반과 국방부 사이버사령부의 댓글의혹을 수사했던 경찰과 국방부 조사본부는 '정치댓글은 맞지만 대선개입은 아니다'라는 쌍둥이 같은 결론을 발표했다. 저들은 대통령을 선출하는 최상위의 정치과정을 비정치적인 이벤트라고 주장한 것이다.

 

“자회사는 만들겠으나 민영화는 아니다”

 

정부와 코레일은 알짜배기 철도노선을 분리시켜 경쟁체제를 도입하겠다고 발표하면서도 민영화는 아니라고 손사래 친다. 수많은 전문가들이 이것이 사실상의 민영화임을, 적어도 민영화를 위한 정지작업임을 지적하지만 정홍원 총리와 최연혜 사장은 앵무새처럼 '민영화 아님'을 외칠 뿐이다. 그들의 우격다짐 앞에 논리나 대화는 사치스럽게 느껴진다.

 

“부정선거는 맞지만 대선불복은 아니다”     

 

민주당은 올 한해를 통째로 국정원의 선거개입을 규탄하며 보냈다.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민주당은 대선부정을 신랄하게 비난하면서도 한사코 대선불복은 아니라고 강조한다. 그들은 당명을 바꾸는 것이 어떨까. '과정은 잘못됐으나 결과는 인정하겠다'고 말하는 비민주적인 정당에게 '민주당'이란 이름은 정말 어울리지 않는다.  

 

“난교파티는 맞지만 성접대는 아니다”

 

앞뒤 안맞기로는 검찰이 빠질 수 없다. 5년전 BBK사건 수사 당시 "내가 이 회사의 주인이오"라던 MB를 무혐의 처리했던 검찰은 지난달 김학의 전 법무부 차관의 성접대 등 불법 로비 의혹에 대해 모두 무혐의 처분을 내렸다. 피해자들의 증언과 별장 난교파티 동영상까지 확보했지만 검찰은 갑자기 안면인식장애가 걸려 범인을 식별하지 못하겠다고 발표했다.

 

사람들은 뉴스에서 저 궤변들이 언급될 때마다 김상혁의 어록을 연상했고, 그의 망언은 수많은 기자와 논객들에게 인용되어 풍자의 소재로 활용되었다. 예전처럼 TV에 모습을 드러내지는 않았으나 자신의 어록을 통해 국민들에게 풍자의 미학을 가르쳐주었다는 점에서 김상혁은 올해의 인물로 선정되기에 부족함이 없다.

 

한낱의 개인일 뿐인 김상혁은 음주운전발언 이후 8년이란 세월을 사회적으로 매장당한 채 지내는 아픔을 겪었다. 반면 공신력과 영향력에서 김상혁 개인과 비할 바가 못되는 저 거대한 기관들은 저런 뻔뻔한 궤변을 늘어놓고도 태연자약이다. 이런 앞뒤 안맞는 세상에서 원칙이나 정의, 상식 같은 말들은 공허할 뿐이다. 세종대왕이 구천에서 저 말들을 들었다면 후손을 잘못 둔 당신의 박복함을 한탄하지 않으셨을까.

 

김상혁은 올해 초 모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과거 음주운전 발언을 후회한다고 밝혔다. 올 한해 말의 홍역을 치른 그가 다가오는 2014년을 평온하게 보내길 바란다. 김상혁을 위해서도, 국민들을 위해서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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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다람쥐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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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3.12.30 12:46 신고

    내년에는 없어져버렸으면 하는 문장인데...
    본질을 피하고 도망가려는 사람에게는 이런 뻔뻔한 거짓말이 필요한가 봅니다..ㅠㅠ.

  2. 2013.12.30 14:32 신고

    웃픈문장이 아닐 수 없습니다 ㅜㅜ

  3. 2014.04.05 14:43 신고

    2014년의 대한민국은 그자체가 심각한 블랙코미디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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