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율'없는 야간자율학습

 

고등학교 시절 3년 내내 야자(야간자율학습)를 했다. 내가 했던 것은 아니고 학교 측의 방침이 그러했다. 남달리 국어해석능력이 뛰어났던 나는 ‘자율학습’의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고 그 시간을 자율적으로 사용했다. 주로 당구장에 있거나 자유공원에서 별빛을 벗 삼아 소주를 마시며 야자시간을 보냈다. 그래서 나는 ‘야자'하면 책과 씨름했던 기억보다 당구장과 맥아더 동상이 먼저 떠오른다.

 

문제는 다음날이었다. 학교 측의 ‘방침'을 어긴 나는 교무실로 불려가 전날 누렸던 자율의 대가를 치러야 했다. 운이 좋은 날이면 그냥 넘어갈 때도 있었지만 그렇지 못한 날이 더 많았다. 난 자율학습의 의미에 걸맞게 자율적으로 학습을 거부했을 뿐인데 왜 매를 맞아야 했던 걸까?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학교 측이 자율학습의 의미를 잘못 해석했거나, 현실에 맞지 않는 말이 사용된 것이다. 즉, 오역의 문제이거나 오용의 문제이다. 이렇게 말의 오역과 오용은 현실과의 괴리를 낳는다. 예컨대 '자유민주주의'란 말이 그렇다.

 

어제 박근혜 대통령은 신임 검찰총장에게 임명장을 건네며 "자유민주주의를 부인하는 것, 이것에 대해서는 아주 단호하고 엄정하게 법을 집행해 그런 생각은 엄두도 내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한국에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유민주주의 훼손을 용납못한다'거나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자'는 둥의 구호를 자주 들어 봤을 것이다. 대통령과 정부여당, 보수언론에게 '자유민주주의'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금과옥조로 여겨진다. 대통령의 말처럼 '자유민주주의'라는 것은 정말 대한민국에서 누구도 거슬러선 안되는 신성한 가치일까?

 

자유민주주의, 알고나 쓰자

 

자유민주주의(Liberal democracy): 자유주의와 민주주의가 결합된 정치원리 또는 정부형태이다. 인간의 존엄성을 바탕으로 하여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는 헌법을 세우고 민주적 절차 아래 다수에 의해 선출된 대표자들이 법치주의의 틀 내에서 의사결정을 하는 체제이다.

출처:위키백과

 

뜻 풀이를 보니 더 몽롱해진다. 저 백과는 자유민주주의를 자유주의(Liberalism)와 민주주의(democracy)가 결합한 개념이라고 설명하고 있지만 Liberal democracy란 말은 외국의 정치학 사전이나 영어사전에서 좀처럼 찾아 볼 수 없는 말이다. 한국 밖에서는 거의 쓰이지 않거나 아예 존재하지 않는 말이라는 뜻이다.    

 

'자유민주주의'란 말은 중언부언이다. 자유주의는 근대 기본권 중 하나인 자유권을 보장하는 이념을 뜻한다. 국가권력의 부당한 간섭과 침해로부터 개인을 보호하는 권리인 자유권은 민주주의 작동의 전제조건이기도 하다. 민주주의란 말 자체가 이미 자유주의의 개념을 내포하고 있는 이상 굳이 자유라는 수식어를 붙일 이유가 없는 것이다. 자유주의+민주주의의 결합으로 만들어진 '자유민주주의'는 역전앞, 동해바다와 같은 멍청한 말이다. 다른나라 사람들이 이런 무의미한 합성어를 쓰지 않는 이유다.  

 

저 말이 유독 한국에서만 널리 쓰이는 데는 다른 이유가 있다. 한국의 보수진영에서 통용되는 자유민주주의의 개념은 이것과 조금 다르다. 종북공포증에 걸려있는 한국의 '자유민주주의자'들에게 종북의 뜻이 무어냐 물으면 대체로 이런 답이 돌아온다.

 

"자유민주주의를 부정하는 세력이다" 

 

그들이 말하는 자유민주주의에서 '자유'란 자유권의 보장을 뜻하는 자유주의가 아닌, 자유시장경제체제의 자유를 뜻한다. 즉 시장(자유)주의+민주주의를 접붙인 개념이다. 자유민주주의를 이렇게 해석하면 국가계획경제를 실시하고 있는 북한의 '인민민주주의'의 대척점에 선다. <자유민주주의 부정 = 남한체제의 부정>이라는 우스꽝스러운 등식은 이렇게 만들어진다.

 

그들의 '자유민주주의'에는 또 다른 문제가 있다. 시장주의를 뜻하는 '자유'는 지고지순한 가치가 아닌 당대에 선출된 정권이 지향하는 사조(思潮)일 뿐이다. 그것이 현정권이 지향하는 가치인줄은 모르겠으나 대한민국 국민 모두가 따라야 할 가치는 아니다. 시장주의의 틀 안에서도 저마다 스펙트럼이 다르며, 시장주의자들 사이에서도 그것을 바라보는 다양한 관점들이 존재한다. 사회민주주의나 복지민주주의와 같이 시장주의와 갈등관계에 있는 원리들도 있다. 시장주의의 견제·규제를 지향하는 정치세력이 집권할 경우에도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 국가'라고 말할 수 있을까?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주기적인 선거를 통해 시민의 손으로 권력의 정체성을 바꾸는 것이 가능하다. 고로 민주주의 국가에서의 시장주의는 국민들이 어떤 정치세력에게 표를 주는가에 따라 강화될 수도, 약화될 수도 있으며 다른 이념으로 대체될 수도 있다. 따라서 한가지 정치원리, 사조를 대한민국이 지녀야 할 절대불변의 정체성인 것처럼 설파하는 것은 반민주적인 행태이다.

 

한국의 자유민주주의자들은 이것이 대한민국의 정체성이자 건국이념이라고 강변한다. 그런데 '자유민주주의'란 말은 우리 헌법 어느 구절에도 명시되어 있지 않다. 가장 비슷한 말로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라는 표현이 두 번 등장할 뿐이다. 그들은 여기서 '기본질서'를 빼고 자의적으로 '주의(ism)'를 붙여 신성성을 부여한다. 이렇게 말의 연금술로 탄생한 '자유민주주의'는 건국이념도 뭣도 아닌 별 의미없는 합성어일 뿐이다.  

 

자유민주주의 논쟁이 가장 격화됐던 때는 이명박 정부 시절 역사교과서 개정논란 때였다. 당시 민주주의냐 자유민주주의냐를 두고 양 진영의 일대 논쟁이 벌어졌다. 많은 학자와 논객들이 자유민주주의란 말의 난센스에 대해 지적했지만 여당과 보수언론은 들은 채 만채 예나 지금이나 그것이 만고의 진리인양 설파할 뿐이다. 이런 우격다짐이 통하는 이유는 한국사회에서 자유민주주의라는 말 자체가 강한 반공반북이데올로기로 기능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전히 절반의 국민들은 '자유민주주의'라는 말을 듣는 순간 자유가 결여된 북한체제와의 대비를 떠올린다. 한국의 보수세력에게 '자유민주주의'는 자유시장체제를 강화하고 반공이데올로기를 재생산하는 양수겸장의 카드인 것이다.

 

‘자유민주주의를 부인하는 행위를 용납하지 않겠다’는 말의 모순은 이 말의 모순과 같다.

 

‘한명도 빠짐없이 야간자율학습에 참가해야 한다’

 

야간자율학습에는 '자율'이 없고, 자유민주주의에는 '민주주의'가 없다. 정말 자율학습이라면 학생들 각자가 자의적으로 학습시간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하며, 진정한 민주주의 국가라면 사회구성원의 (시장주의 이외의) 다양한 견해를 인정해야 한다.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자’같은 구호가 사회일반에 강요될 수 없는 이유다. 사회구성원 모두가 지켜야 할 가치는 민주주의일 뿐 시장주의, 자유민주주의가 아니다. 말을 바로 사용하는 것만으로도 많은 것을 바로잡을 수 있다.   

 

'자유'와 '민주주의' 인류 문명이 자랑하는 숭고한 가치들이 한국에 와서 수난을 겪고 있다. 지난 정부에서 현정부로 이어진 새누리당 정권은 국가기관을 동원해 여론을 조작하여 시민의 자유권을 침해하고 민주주의를 훼손시켰다. 그런 권력이 ‘자유민주주의 수호’를 힘주어 외친다. 반면 자유권과 민주주의 회복을 위해 부정에 맞선 시민들은 ‘자유민주주의의 적’으로 매도된다. 이들 중 ‘자유민주주의’를 제대로 해석한 쪽은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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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다람쥐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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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3.12.05 10:18 신고

    씁쓸합니다. 언제부터 당연하게 여기던 민주주의가 이상한 표현으로 변질되어 신격화된겁니까? 그럼에도 윗사람들 편의에 맞게 바뀌면서 생기는 모순이 보이니 우리는 체제만 다른 전체주의 국가에 사는 것같습니다

  2. 2013.12.05 13:04 신고

    이번 글 정말 마음에 드네요. ㅎㅎ

    다람쥐주인님의 국어해석능력이 남다르다는 것을 재차 확인했습니다. ^^

  3. 2013.12.05 14:32 신고

    자유민주주의도 수입 학문인데요... 그리고 자유주의가 언제부터 시장 영역적인 측면에서 몰아가는 지 모르겠습니다 이것 또한 정치이념인데

  4. 2016.04.04 10:58

    비밀댓글입니다

  5. 2016.04.04 11:32 신고

    사진작가입니다. 사진 사용하시면서 출처나 좀 밝혀주셨으면 좋았을것 같네요.

    자유민주주의를 말하는 사람일수록 다른이의 권리에도 밝아야 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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