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문제와 마주해도 늘 '나는 가운데에 있을거야'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가치중립이 아닌 '중립자'의 강박을 가진 사람들이다. 그런 부류의 사람들에게는 차갑움이나 뜨거움, 밝음과 어두움 같은 건 아무 의미가 없다. 그저 '가운데'로 움직이려는 관성만이 존재할 뿐이다. 그들에게는 가운데라는 지점이 곧 선이고 정의이자 안전이다.

그들이 머무르는 곳은 언제나 사회일반의 평균이다. 그것의 움직임에 연동해 언제고 움직일 준비가 되어있는 유목민의 삶, 그들이 움직인 자리에는 먼지만이 남을 뿐이다. 영혼도 실체도 없이 오로지 잠시 서있을 '지점'만을 찾아 움직이는 그들은 떠다니는 섬이요 다리없는 유령이다. 

 

당신은 누구요? "가운데 있는 사람이오"

 

어제 안철수 신당의 준비기구인 새정치추진위의 첫 회의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 안 의원은 안철수 신당의 정치적 지향에 대해 "어느 한쪽의 치우침 없고 국민을 우선하는 합리적 개혁주의"라고 밝히고 "시대적 요구와 역사적 책무에 대한 굳은 소명의식이 있어야 한다", "변화에 대한 진정성 있어야 한다"며 뜬구름잡는 말의 성찬을 쏟아냈다. 신당의 핵심 참모 송호창 의원과 금태섭 변호사가 말을 이어갔지만 손에 잡히는 이야기는 누구의 입에서도 들을 수 없었고 오직 기성정치권에 대한 일차원적인 성토만이 이어졌다.

 

대선 후 1년, 입국 후 9개월이 지났지만 여전히 정치인 안철수와 안철수 신당의 형체는 흐릿한 '중도지향'에 머물러 있다.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남을 공격하기란 쉬운 일이다. 그런건 대중과 평론가들의 몫이다. 현실정치 깊숙히 발을 들여 놓은 유력정치인이 저런 무색무취한 말로 자신을 포장하는 건 비겁하고 무책임하다.   

 

'정치적 중도'라는 지위는 내가 가진 정치적 지향이 사회일반의 가운데쯤 머물 때 '우연하게' 얻게 되는 지위다. "난 언제나 너희들 가운데 있을거야"라는 인위적인 노력이나 '태도'로 얻을 수 있는 지위가 아니라는 거다. 타인에 의해 규정되는 '중도'라는 건 실체없음의 다른 말이다.

 

안철수 신당 창당이 가시화되자 많은 언론들은 그것이 정치권에 가져올 파장을 분석하느라 열을 올린다. 정치가들이야 각각의 셈법에 따라 계산기를 두드리는 것이 당연지사지만 일반 시민들까지 그들의 정략적 계산에 매몰될 필요는 없다. 유권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누가 센가'에 관한 정보가 아닌 '누가 나은가'에 대한 판단이다. 

 

난 안철수 신당이 망했으면 좋겠다. 더 정확히 말하면 한국정치의 발전을 위해 그러는 편이 좋다고 생각한다. 악담으로 들린다해도 할 수 없다. 나쁜 건 나쁜 거다.

 

 

"선거 끝나고 1년이 다 되가는 지금 결국 정치는 단 한 발도 못나가고 있다. 국민 삶보다 정쟁에 몰두하는 정치, 다음 정권탈취에만 관심두는 정치는 이제 사라져야 한다" - 안철수 의원

 

지난달 원로 정치인들의 모임 '국민동행' 창립대회에서 나온 발언이다. 특유의 하나마나한 이야기들 속에 거친 단어 하나가 귀에 거슬린다.

 

"정권탈취"

 

한국정치사에서 저 말은 주로 5.16이나 12.12 쿠데타를 설명하는데 사용된다. 안 의원은 저 말을 한국의 정치일반을 뭉뚱그려 지칭하는데 사용했다. 현실정치인의 입에서 나왔다고 믿기지 않는 극한의 정치혐오다. '탈취'라는 표현은 결코 돌발적으로 튀어 나온 말이 아니다. 안 의원은 정치 데뷔 이후 기성정치권과의 거리두기를 자신의 유일한 전략으로 삼아 왔다. 그날의 발언은 안 의원이 일관되게 보여왔던 정치혐오의 연장선상에 있으며, 여전히 그의 정치혐오가 조금도 누그러들지 않았음을 확인시켜준다.   

 

정권창출은 모든 제도권 정당의 기본 목표이다. 이것은 마치 빗물이 하늘에서 땅으로 떨어지는 것이나 지구가 끊임없이 태양 주위를 도는 것과 같다. 정권을 창출하려는 정당의 노력·욕구는 선악의 기준으로 판단 될 수 없는 정당의 본질 그 자체인 것이다. 그걸 '탈취'라는 날강도의 언어로 해석하는 사람은 아마 아나키스트이거나 바보일 것이다. 작년 대선후보 양보 기자회견장에서 쏟았던 당신의 눈물은 '정권탈취 포기'에 대한 아쉬움이었나? 

 

작년 12월 11일 역삼동의 한 오피스텔에서 국정원 대선개입사건의 꼬리가 잡혔다. 대선을 목전에 두고 벌어진 엄청난 사태에 대해 야권과 시민사회는 한목소리로 비난을 쏟아냈지만 범야권에서 유독 다른 목소리를 냈던 인물이 있었다. 사건이 발생한지 4일 뒤 안철수 후보는 박근혜-문재인 양 후보 모두를 향해 “혼탁선거를 중단하라”고 비난하며 문재인 후보 지원유세를 일방적으로 중단했다. 그는 당시 야권과 시민사회가 주장했던 '국정원 불법대선개입사건'과 새누리당이 주장했던 '여직원 감금사건'을 같은 무게로 취급했던 것이다. 당시의 입장이 진심이었다면 기본적인 사리분별력에 문제가 있는 것이고, 진심이 아니었다면 심각한 도덕불감증을 의심해야 한다

 <안철수가 국정원정국에서 주변인이 된 이유>  

 

새것은 항상 옳은가?

 

정치신인 안철수가 기성정치와 구분되는 '새것'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얼마나 새로운가'보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좋은가’이다. 그동안 안 의원이 밝혀 왔던 정치개혁에 대한 생각들을 요약하면 정당을 축소하고 공천을 포기하고 의원수를 줄이는 것이다. 결국 새정치란 '비정치' 혹은 '반정치'의 다른 말이다. 저것도 정치라면 우표를 모으지 않는 것도 취미다. 한국에 필요한 정치가는 정치를 단단하게 발전시킬 정치가이지 안그래도 취약한 정치토양을 허물고 축소시킬 정치가가 아니다.

 

새것의 당위는 '낡은 것이 얼마나 나쁜가'가 아닌, '새 것이 얼마나 좋은가'로 설명되어야 한다. 그러나 안 의원은 새정치의 당위를 오직 기성 정치의 해악만으로 설명하려 한다. 낡은 것에 대한 혐오만으로 새것을 포장할 수는 없다. 그 자체로 얼마나 좋은 것인가를 설명해내지 못하는 '새정치'를 대안으로 삼을 이유는 없다.

 

정치혐오가 만연한 한국사회에서 안 의원이 택한 ‘비정치’라는 상품은 소양이 부족한 정치신인이 택할 수 있는 가장 간편한 상품이다. 민주화 이후 한국에서 가장 성공한 정치혐오가는 이명박 전 대통령이다. MB는 2007년 대선기간 내내 "나는 여의도 정치를 모른다"며 노골적인 비정치 캠페인을 벌였다. 민생과 실용이라는 수사로 그럴싸하게 포장됐던 MB의 '반여의도 정치'는 안철수의 새정치의 구버전이다. MB가 성공적으로 활용했던 '나도 정치가 싫으니 정치가 싫은 사람은 모두 나를 찍으시오'전략은 차기에 안철수가 사용할 가능성이 매우 높은 전략이다.

 

지난 5년은 정치혐오가가 대통령이 되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확인시켜준 시간이었다. MB와 비교되는 것이 억울할지 모르지만 안 의원의 정치혐오는 이미 MB의 그것을 뛰어넘은 것으로 보인다. MB는 적어도 '정권탈취' 같은 노골적인 말로 기성정치를 공격하지 않았다. '안철수 효과'가 단순한 정치혐오의 취합이라면 이보다 나쁜 것은 없다. 한국정치의 발전을 가로막고 있는 대중의 정치혐오가 '새정치'라는 예쁜 이름으로 취합-포장되는 것은 비극적인 일이다.

 

관련글  ‘민생’이라는 이름의 기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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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다람쥐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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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3.12.10 12:11 신고

    중도라는 평가를 누가 내렸는지를 되짚어볼 필요가 있을 듯합니다. 중도가 좋지 못하다는 건 알겠는데, 안철수가 중도라고 하는 건 새누리당이 보수고 민주당이 진보라는 전제로 시작되는데, 거기에 대해서 의문이 생깁니다. 우리 나라는 굉장히 극단적인 예외에 속합니다. 다른 민주주의체제의 국가들의 일반적인 정치색 스펙트럼으로 구분하자면, 안철수는 그냥 보수라고 보는 게 타당한듯합니다.. 또한 정권탈취라는 표현의 의도성에 대해 굉장히 집요하게 탐색하고 있지만 글자체에 근거가 매우 희박할 뿐더러, 21세기 들어서 이번 선거만큼 총체적으로 의혹 내지 실체적 증거가 존재하는 경우는 없었지않습니까.. 이 모든 걸 정부, 여당, 공기관이 알고, 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정권탈취라는 표현의 의도성에 촛점을 맞추고 계시는 것을 보니, 진정으로 안철수 이미지 메이킹에 신경쓰신분은 글쓴이 본인 이신듯합니다 ㅠ

  2. 2013.12.10 17:25 신고

    뭘까!!!

  3. 2013.12.10 18:56 신고

    날카로운 지적입니다.
    중도라는 착각과 환상에서 벗어나야 안철수의 새정치라는 것도 그 형체를 드러낼 겁니다.

  4. 2013.12.11 02:33 신고

    새정치가 뭔가 진정성있게 보여줄거다 입닫고 기다려라

  5. 2014.01.15 17:50 신고

    공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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