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그녀에게 '여성스러움'을 강요하는가

 

한 여자축구선수가 '여성성'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퇴출위기에 놓였다는 매우 '한국적인' 뉴스다. 여자 실업축구 WK리그 6개 구단이 지난 5일 서울시청의 간판인 박은선 선수의 성정체성에 문제를 제기했다. 이날 6개 구단 감독들은 박 선수를 계속 경기에 뛰게 하면 리그 자체를 보이콧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지난 시즌 득점왕에 올랐던 뛰어난 실력과 180㎝, 74㎏의 훤칠한 몸매, 짧은 머리 많은 팬들을 매료시켰던 그녀의 '남성스러움'이 그녀를 뜻밖에 곤경에 빠뜨렸다. 타구단 감독들이 '여성스럽지 못하다'는 이유로 박 선수의 퇴출을 요구한 것이다.

 

얼핏 이 문제는 단순한 생물학적인 성(sex)의 문제로 보인다. 그러나 내막을 들여다보면 이 사건에 섹스와 젠더(gender)의 문제가 어수선하게 뒤엉켜 있음을 알 수 있다. 단순한 섹스의 문제였다면 성별검사로 간단하게 매듭지어졌을 일이 왜 이렇게 시끄러워진 걸까?  

 

“성별 검사도 한두번 받은 것도 아니고, 월드컵, 올림픽 때도 받아서 경기 출전하고 다 했다. 그때도 어린 나이에 기분이 많이 안 좋고 수치심을 느꼈는데 지금은 말할 수도 없다. 한 가정의 딸로 태어나 28살이 됐는데, 절 모르는 분들도 아니고 저한테 웃으면서 인사해 주시고 걱정해 주셨던 분들이 이렇게 저를 죽이려고 드는 게 제가 고등학교 졸업 후 실업팀 왔을 때와 비슷한 상황 같아서 더 마음이 아프다. 그때(실업팀 입단 때)도 절 데려가려고 많은 감독님들이 저에게 잘해주시다 돌변하셨는데 지금도 그렇다" - 박은선 선수 페이스북 

 

박 선수의 퇴출을 주장하는 축구계의 논리는 여자축구선수면 '여자답게' 적당히 잘해야 하는데 '남자처럼' 너무 잘해서 문제라는 것. 놀라운 것은 박 선수의 퇴출을 주장하는 관계자들도 그녀가 생물학적인 여성임을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정리하자면, 그들은 박은선 선수가 여자임을 알고 있었음에도 그녀가 '여성스럽지 못하다'는 이유로 여자 축구리그에서 퇴출을 요구한 것이다. 이 대목에서 이것이 단순한 섹스의 문제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박 선수의 예가 극단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한국사회에서 여성들이 '여성성' 부족으로 인해 공격받는 일은 흔하다. 성별분업 사회에서 '여성스럽지 못함'은 분야를 막론하고 죄악으로 여겨진다. (남성들의 남성스럽지 못함 역시 마찬가지다) 이 공격에 대한 피해여성들의 대응매뉴얼은 대체로 정형화 되어 있다.

 

"겉으론 강해 보여도 알고보면 저도 나약한(마음여린) 여자에요...ㅠ"

 

실제로 박 선수를 옹호하는 목소리 중에는 "분명 여학생이었고 여성스러운 면도 있는 착한 아이인데..."라는 식의 가부장적인 온정이 다수를 이룬다. 저런 태도는 그들의 비판을 반박하는 듯 보이지만 사실은 동조하는 셈이다. 저 구차한 변명을 정확히 해석하면 이렇다.

 

"(여성성이 부족한 여성은 비반받아 마땅하다는) 당신들의 주장은 옳으나, 사실 내게도(그녀에게도) 당신들이 알지 못하는 숨겨진 여성성이 있다"

 

'여성성 결여'에 대한 비난을 '여성성의 증명'으로 모면하려는 태도다. 피해자들은 이런 식의 '변명'으로 당장의 곤경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 그러나 이런 태도는 결과적으로 공격의 근거가 된 성별분업 프레임을 강화-재생산하는데 일조한다. 그런 면에서 박은선 선수의 대응은 꽤나 이색적이다. 그녀는 자신을 향한 축구계의 공격에 대해 "알고보면 저도 연약한 여자에요"라며 그들이 짜놓은 판 위에서 싸우지 않고, "니들 수작 다 보인다"며 문제의 본질을 정면으로 지적하고 있다. 그녀의 지적대로 문제의 본질은 박 선수의 성별이 아닌, 그녀가 가진 월등한 실력을 견제하려는 축구계의 비열함에 있다. 

 

여자축구리그 6개 구단은 치졸하게도 박 선수의 실력에 '여자답지 못한'이라는 전통적인 젠더 프레임을 덮어 씌웠다. '남성다움-여성다움'이라는 사회적 통념을 상대팀 에이스 죽이기에 활용한 것이다. 영민하고 저열하다. 이 말도 안되는 공격으로 박 선수가 퇴출된다면 그녀의 퇴출을 담합한 구단들은 내년 시즌에 보다 나은 성과를 거둘 가능성이 높아진다. 퇴출이 무산된다 해도 박은선 선수의 플레이는 이번 파문으로 인해 위축될 가능성이 크다. 이제 박 선수는 그라운드에서 몸싸움을 할 때마다, 골을 넣을 때마다 마음 한켠에 자신의 '남성스러움(실력)'이 부담으로 다가오지 않겠는가. 상대팀의 에이스에게 '남성성'에 대한 트라우마를 심어준 것 만으로도 그들은 소기의 성과를 거둔 것이다.  

 

나는 가능하다면 그녀가 이나라를 떠나 다른 리그로 진출하는게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덜 여성스러워도 되는' 리그로 말이다. 뛰어난 실력이 '남자다움'으로 매도당하는 리그라면 박은선 같은 훌륭한 선수를 품을 자격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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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다람쥐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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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3.11.06 19:13 신고

    참 한심한 여자팀 감독 관련자들 ...같으니..

  2. 2013.11.06 23:10 신고

    진짜 뭐라 할말이 없네..ㅠㅠ...이런...

  3. 2013.11.07 11:53 신고

    머리를... 길러야 하나요???

  4. 2013.11.18 21:56 신고

    보고 있노라면 앞만 보고 있다고 믿으면서 정작 중요한 건 다 버리고 달려온 한국의 현실이 투영되 보여서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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